111주년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저녁 서울 강남구 신사역 일대는 페미니즘 단체 회원들의 고성으로 가득 찼다. 버닝썬 사태로 불거진 클럽 내 성폭력 의혹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수백명의 여성들이 모인 것이다. 이들은 클럽 약물 사용 및 유통과 여성 무료 입장 등을 ‘강간문화’로 일컬으며 이런 문화가 빠른 시일 내에 타파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9일 불꽃페미액션과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8시쯤 여성단체 회원 170여명과 남성 10여명이 신사역 2번 출구 앞에 모여 한국의 남성중심적 클럽 문화를 비판하는 집회 ‘버닝, 워닝’(Burning, Warning)을 열었다. 이들은 클럽 내 성폭력을 전수 조사할 것과 클럽 안에 외부 폐쇄회로(CC)TV를 설치할 것을 촉구했다. 또 경찰이 아닌 제3의 독립 기관이 클럽 범죄를 수사해줄 것과 물뽕 유통을 엄벌해줄 것도 요구했다.
이가연 불꽃패미액션 활동가는 행사 시작 발언에서 “여성 70%가 클럽에 여성이 무료로 입장하는 것을 성차별이라고 생각한다”며 “이는 여성을 상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 활동가는 이어 “경찰과 클럽 등이 강간문화 유지에 일조한다”며 “여성들은 약물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음료를 마시지 않거나 적어도 음료를 두고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클럽에 가본 적 있는 여성 110명 중 77명이 성희롱을 경험했다고 대답한 자체 설문조사 결과도 발표했다.
여성단체 회원들은 시작 발언이 끝난 오후 8시10분쯤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고추 모형을 달아 만든 끈을 자르는 커팅식을 한 후 클럽 아레나로 행진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클럽 아레나 MD가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취지의 구호를 외친 뒤 버닝썬이 있던 역삼동 ‘르메르디앙 서울’ 호텔까지 이동했다. 오후 9시쯤 도착한 회원들은 ‘버닝, 워닝’ 현수막 아래서 “국가는 여성이 폭력과 성접대에 노출되는 클럽 강간 산업을 멈추라”고 소리쳤다.
신지예 녹색당 운영위원장은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문제”라며 “디지털 성폭력을 외면하다 거대한 괴물이 돼서야 문제를 인지했다”고 주장했다. 신 위원장은 또 “여성도 꿈이 있고 사랑받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며 “여성을 침대에 눕힐까 고민한 남성은 스스로를 부역자라고 생각하고 반성해야 하고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고 외쳤다.
집회 참가자들은 여성들이 클럽에서 자유롭게 춤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생 황모(25·여)씨는 “프랑스에 여행 갔을 때 경험했던 클럽은 남녀노소가 모두 즐기는 건강한 곳이었다”며 “한국처럼 나이와 복장 제한이 있고 예뻐야 입장할 수 있는 클럽 문화를 깨고 싶어 참가했다”고 말했다. 대안학교에 다닌다는 최모(19)씨도 “학교에서 페미니즘 강의를 3년 들으니 한국사회가 잘못됐다고 느꼈다”며 “남자가 1명이라도 더 참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나오게 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약물과 성폭력 없는 클럽문화를 보여주겠다”며 야외에서 클럽 음악을 틀고 춤을 추기도 했다.
시민들은 참가자들과는 달리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시위를 구경하던 대학생 이모(25·여)씨는 “버닝썬 사태가 영화에서 일어날 만큼 황당한 사건인 것은 알겠다”면서도 “버닝썬이 왜 여성주의와 연관되고 페미니즘 단체가 나서는 것인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논현역 근처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40대 여성 이모씨도 “기다랗게 행진을 하는 것은 손님들만 불편하게 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경찰은 돌발 상황에 대비해 2개 중대 100여명의 경력을 집회에 배치했다. 경찰은 이번 시위가 페미니즘 시위라는 것을 감안해 1개 중대 50여명은 여경으로 채웠다. 다행히 집회는 별다른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앞서 여성단체 불꽃페미액션은 지난해 6월 역삼동 페이스북코리아 사옥 앞에서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진행하다 이를 제지하려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인 바 있다.